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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년 12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Buenos Aires, diciembre de 1989)
    텅빈... 와인통/┏ 잡담¡마음가는.. 2020. 8. 17. 09:38


    아침 일찍 아이가 화장실 문을 여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머리에 손가락 빗질을 하며 일어나 냉장고에서 요거트와 과일을 꺼내 밤샘 공부를 했을 아이의 아침을 준비한다.
    등교 준비를 마치고 나서는 아이와 나 사이에는 아침마다 반복되는 실랑이가 기다리고 있다. 안먹는다는 아이와 어떻게든 먹이려는 나. 신을 신고 문을 나서려는 아이를 잡아 억지로 요거트라도 마시게 하고 나가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시험 잘 보고 오라고 안아준다.

    아이는 이번주 내내 학기 마지막 시험기간이라 계속 몇시간 못자면서 서툴고 익숙치 않은 언어로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낯선 곳에서의 학교 생활이 적응하기도 힘든게 많을텐데 꾸역꾸역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든든하고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우리 가족이 벌써 두번째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이곳은 한국과는 밤과 낮도, 계절도 반대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다.
    2년 전 공항에서 친지들과 이별을 하고 아주 긴 시간 하늘을 날고 날아서 온 이나라는 공기까지도 낯선 곳이었다.

    여름 햇살이 이른 시간부터 쑫아져 들어오는 베란다로 아이가 멀어지는 모습을 쳐다보면서 부랴부랴 가게에 나갈 준비를 서두른다. 퍼마켓을 차린지도 벌써 1년 반이 되어간다.
    익숙치 않은 고된 일들과 낯선 언어로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과의 일상은 날선 긴장감으로 때로는 힘들지만 그래도 하루 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하며 있다보면 손님들이 아는 척 하고 인사를 한다. 동사변형 같은 것을 무시하고 엉터리 스페니시를 해도 다 알아듣던 손님들이 이제는 조금씩 틀린 부분들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매일 카운터에서 찬송을 흥얼거렸더니 콜론극장 연주회 티켓을 주기도 하면서 손님 보다는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아침에 문을 열면 우유부터 시작해서 받아야 하는 물건들도 많고 요즘에는 특히나 심한 인플레이로 인해 가격표도 매일같이 수정해줘야 된다. 그렇게 바쁜 오전 시간이 지나고 점심 시간이 되면 씨에스따, 낮잠시간이다.

    가게 문을 닫고 한블럭 떨어진 집으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정전 안내문이 눈에 띈다. 지금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더운 여름에 전력 부족으로 구역별로 시간을 정해놓고 정전을 실행하고 있다.
    시험을 마친 아이는 내일부터 방학이라면서 식사시간 내내 들떠서 종알종알거리더니 아빠와 도매상에 간다고 나가고 나는 마테를 준비한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이 마테는 엑토르 할아버지가 권해주고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줬었다. 우리 가게에 매일같이 출퇴근 하다시피 와서 자잘한 문제부터 서툰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 엑토르 할아버지.
    작년 이맘때 즈음, 지금보다도 더 서툰 언어로 일상의 수다를 떨다가 한국에서처럼 지나가는 말로 언제 식사 한번 하자고 했었는데, 그 말이 문제가 될 줄 몰랐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하면 그건 약속이 되는거라는걸 미처 몰랐었다.
    며칠 후 정장을 차려입고 온 엑토르 할아버지에게 무슨 좋은 일 있냐면서 평상시와 다르지 않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가 퇴근을 했었는데 그 다음날 서류 봉투등을 들고 오셨었다. 당신은 약속 안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집문서 등을 보여주시면서 화를 내시는데, 나는 약속이라고 생각 못했다라든지 집에 손님이 있었다라는 등 내가 하고싶은만큼의 설명을 하기에 내 스페니시는 부족했다. 단순히 문화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몰라도, 약속이라고 생각하고 왔었던 할아버지에게 미안했었다.
    결국 그날 이후 엑토르 할아버지는 오시지 않았다. 소중한 인연을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마테를 마실 때마다 엑토르 할아버지가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테잔은 치우고 한시간 꿀잠을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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